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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이야기

종소리 - 이정연

 

 

 

 

종소리

    이정연

 

아침 눈을 뜨기는 했지만 나른한 반수(半睡)상태의 내 발목을 잡는 이불의 포근함에, 좀더 몸을 맡기고 있으니 꿈결처럼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 희망원 앞 대곡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다. 종이야 늘 새벽 기도하는 이 시간에 울렸을 텐데, 어떻게 그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일까.

 

모든 종소리는 아름답다. 초등학교시절 교무실에서 창을 열고 팔을 뻗어 수업을 알리던 종소리는 명랑하기 그지없다. '땡땡' 하고 두 번 치면 쉬는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고, '땡땡땡' 하고 세 번을 연달아 치면 곧 수업이 시작되니 어서 들어오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남학생들은 상대의 골문 앞에서도 곧 차기를 멈추고 축구공을 안고 교실로 달렸고, 고무줄 하던 여학생들은 삭아서 잇고 잇느라 매듭투성이인 고무줄을 재빨리 손에 감았다. 한 번도 그런 종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지만, '땡땡 땡땡....' 계속해서 다급하게 울리면 뭔가 긴급한 사항이 발생되었으니, 재빨리 하던 일을 멈추고 주목하라는 뜻이라고 선생님께 들은 기억이 새롭다. 등교하면 교사 중앙에 있던 교무실 처마 밑에 다소곳이 매달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하던 그 종, 개구쟁이들의 노래와 함성과 다툼이 고스란히 빨려 들어간 그 추억의 종소리는 아스라한 세월의 강을 건너 삼 십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오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로 아름다운 종소리는 교회의 저녁 종 소리였다.

시계가 흔치 않던 그때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교회의 종소리는 귀가를 알리는 다정한 신의 목소리였다. 뉘엿뉘엿 게으른 햇살이 아직도 논둑 언저리에 머무는 저녁, '오늘 하루도 참 수고하셨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세요. 댕그랑 댕그랑.' 들판을 가로질러 먼 산골짜기로 곧장 사라지던 그 깊은 여운은 고마운 염려요 안식이요 평화였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머니는 고단한 허리를 펴며 옷의 먼지를 털고, 아저씨는 주섬주섬 연장을 챙기는 들녘의 풍경은 밀레의 '만종' 그림과 함께 영원한 내 마음의 풍경이 되었다.

 

세 번째로 아름다운 종소리는 운문사에서 아버님과 함께 들었던 저녁 종 소리였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스님들이 넓은 야채 밭에서 마치 창공을 나는 기러기 떼의 행렬처럼 도열한 채, 더러는 앞서고 더러는 뒤쳐져서 분주하던 밭이 어느새 비었는가 싶어 허전함을 느끼는 잠시, 법복의 깃을 단정하게 여민 스님 두 분이 범종루로 올라가시는 게 보였다. 물기 머금은 까만 눈동자, 새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고무신, 넉넉한 법복의 소매 아래로 수줍게 드러난 가늘고 뽀얀 손목 그 스님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와 섬광처럼 부딪혔다. 한없는 그리움을 담은 애절한 눈빛이 촉촉이 젖어 석양에 더욱 고혹적으로 빛났다. 비장하고 순결한 그 아름다움에 나는 호흡이 정지될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왜 이 시간 발끝으로 사뿐사뿐 범종루의 나무계단을 올라야 하는지....

꼭꼭 여민 법복 아래 가녀린 저 손목으로 큰 당목을 움직여 과연 저 종루 위의 범종을 울릴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솔 숲 사이로 보이는 서녘 하늘엔 분홍빛 레이스 같은 구름이 곱게 번지고, 산마루에는 곤지 같은 해가 살풋 얹힌 게 보였다. 고운 여승의 등에 비스듬히 내려앉은 붉은 햇살 너머로 '우웅....' 하고 첫 종소리가 들렸다. 길게 여운을 남기며 온 경내를 울리던 그 소리는 대웅전 처마 끝 풍경을 파르르 흔들다가 창공으로 사라졌다. 그 것은 못 내 끊어버리기 어려운 세속에 대한 호된 질타 같기도 하고, 차마 언어로는 표현 못할 그 스님의 사무친 울음이 골짜기마다에 메아리 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우우우웅....' 산이 우는 듯한 두 번째 종 소리가 들렸다. !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었다. 억만 겁의 세월을 지나 깊고 깊은 지층을 뚫고 올라와 산 중턱에서 울리는 땅이 우는 소리였다. 그것은 연꽃잎처럼 사원을 감싼 운문산, 호거산, 억산 장군봉을 차례로 울리고 빙빙 돌아와 다시 내 발 밑의 지층을 흔들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잠든 네 영혼을 깨우라!' 발 밑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무릎엔 힘이 빠지고 아버님도 나도 한 그루 나무처럼 그 자리에 멈췄다.

빤히 종루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서 타종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기실 종소리는 어디서 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산 중턱 어디쯤에서 들리는가 하면 발 밑을 울리고, 발 밑이 울리는 가 하는데 창공을 나는 새가 숲으로 몸을 황급히 숨겼다. 그런가 하여 하늘을 보니 그 소리는 이미 잦아져, 이번에는 이끼 낀 청동 범종 빛같이 푸른 계곡의 소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수 천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는 호거산 호랑이의 포효 같기도 하고 산의 나무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함성, 숲의 반란 같기도 하였다. 의식은 차츰 몽롱해져 나는 내가 어디에 사는 사람인지 뭘 하는 사람인지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버님의 넓은 어깨도 도무지 미동이 없었다. 호미를 던지고 나를 따라 나설 때부터 희미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시류를 따라 부침하며 흘러가는 안쓰러운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날 당신의 푸른 영혼과 재회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그러나 한 그루 나무처럼 엄숙하게 서서 그 타종을 지켜보는 등은 끝내 내게 아무런 물음표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찌 나와 아버님뿐이랴!

숲 속에서 재재거리던 산새 소리도 그쳤고 산마루에 결렸던 해도 산 아래로 떨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우람한 산사의 법당도 문이 닫히고 바람마저 잦아들어 조용하기 그지없다. 무릇 살아있는 것들은 다 존재를 부끄러워하며 몸을 숨겼다. 깊은 계곡에 머물던 푸른 안개가 내려와 슬금슬금 숲의 빈곳을 채우는 게 보였다. 희미한 의식을 잡고 간신히 서 있는데

'우우우웅....' 마지막 종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종소리가 어디서 울리는지 분간하려는 노력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수고가 다 부질없었다. 다만 나는 어서 세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유리시키는 그 소리 너머로 달아나고 싶었다. 어둠이 모든 걸 빠르게 삼켜가고 있었다. 대웅전을 삼키고 반송을 삼키고 늘어선 돌탑을 삼키고 나무를 삼키고 숲을 삼켜가고 있었다.

 

  (출처: Yeonessay.com, 200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