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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이야기

가자, 행복의 나라로

[매경의 창] 가자, 행복의 나라로

출처: MK뉴스, 2012.12.13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오는 걸까?`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댄 길버트의 행복에 관한 연구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18세에 SF작가 지망 고교 중퇴자였던 그가 원하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심리학 코스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처럼, 행복이란 꼭 우리가 기대하던 곳에 있지는 않다는 말일까?

실제로 거액의 상금을 탄 로또 당첨자들과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추적해 보니 1년 후 두 그룹의 행복지수가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수천만 달러의 횡재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장애가 어째서 행복에 별 상관이 없을까?

길버트 교수는 다른 `불운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스캔들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은 정치인, 동업자의 실수로 막대한 부를 놓친 기업인, 누명을 쓰고 수십 년간 감옥살이를 한 선량한 시민,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비틀스에서 밀려난 드러머 등을 만나보았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외형상 상당한 불운을 겪은 이들이 의외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본 길버트 교수는 행복이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오히려 인간은 행복을 적극적으로 `제조`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는 뇌의 전두엽피질의 시뮬레이션 기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는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 주어진 상황을 실제보다 더 좋게 인지하는 시뮬레이션 기능이다. 이 시뮬레이션은 주체에게 곧 실제 상황이 된다. 일종의 심리적 면역체계라 할 수 있겠다. 상상을 실제로 만드는 대뇌의 이 훌륭한 기능 덕분에 인간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제조`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선택의 여지 없음`이다. 실제로 피실험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었을 때는 주어진 상황을 더 좋게 받아들이는 시뮬레이션이 잘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행복감도 줄어들었다. 마치 예전에 얼굴도 보지 않고 혼인해서 백년해로하던 조상들이 오늘날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또 이혼할 수 있는 우리에 비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도 산업사회는 우리를 선택의 홍수 속에 밀어 넣는다. 요사이 커피전문점에서는 적어도 서너 번의 선택을 해야만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청바지를 사려면 수십 종의 비슷비슷한 스타일을 섭렵해야 하고, 보험이나 금융상품은 하도 복잡하고 다양해 결국 선택을 포기하게 한다. 오늘날 청년들의 불만에도 다양한 진로에 대한 선택의 압박이 미래 전망의 불투명성과 함께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 행복(복지)을 선택의 자유와 동일시한 산업 자본주의의 도그마에 반기를 드는 심리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견해는 적정 수준 이상의 선택의 자유는 무기력감과 불만족, 나아가 선택의 책임을 자신에게 부과함으로써 심각한 우울증까지 유발한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그 적정 수준을 초과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까? 선택의 자유가 행복의 훼방꾼이 되지 않는 그 적정 수준은 어디쯤일까?

"인생이 비참하고 무질서해지는 까닭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에게 선호는 있다. 하지만 그 선호로 인해 신중함이나 공정성, 그리고 내적인 평안을 깨뜨린다면 후회할 수밖에 없다"고 애덤 스미스가 1759년 `도덕감정론`에서 경고한 바 있다.

 

자본주의의 아버지 스미스는 무한 욕망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장착된 도덕감정-인애와 정의-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고 했다.

행복을 약속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계절이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이제 내부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볼 때가 아닌가 싶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